커피와/추출

배치 브루(Batch Brew), 그리고 추출의 시간

Coffee Explorer 2018. 6. 9. 16:58

배치 브루(Batch Brew), 한 회차에 여러 잔 분량을 추출한 브루잉 커피를 말하는 용어입니다. 스타벅스에서 판매하는 '오늘의 커피'라고 하면 쉽게 연상될거라 생각합니다. 배치 브루는 미국 등에 비해 한국에서는 판매가 많지 않았는데요. 10여년 전 제가 일했던 매장에서도 메뉴에는 있었지만 판매 비율은 매우 낮은 편이었습니다.


최근 2-3년 사이에는 배치 브루를 적용한 매장들을 다시 찾아볼 수 있었는데요. 10년 전의 배치 브루와 지금의 배치 브루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매장이나 브랜드에 따라 다르지만, 10년 전의 배치 브루는 일반적인 원두가 아니라 분쇄된 상태로 유통되는 커피 가루(ground coffee)였던 경우가 많았다고 기억합니다.


이 글을 통해서 제가 경험한 배치 브루 커피 이야기와 간단한 추출 팁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다양한 배치 브루 머신


사람마다 커피에 대한 경험과 기억은 다를텐데요. 저는 '배치 브루' 하면 위의 사진과 같은 '구조'의 추출 도구가 먼저 떠오릅니다.(물론 이 사진은 최신의 머신입니다.) 저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 초반에 주로 이런 도구를 사용해서 커피를 내려 마셨죠. 적은 양부터 1리터 정도의 커피를 한번에 추출할 수 있는데, 과거의 머신들은 저렴한 가격이었지만 물 온도를 정밀하게 제어해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사진 출처 : https://www.wilburcurtis.com/product/d500gt63a000

2000년 후반에 만났던 배치 브루 머신은 이런 모습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정확하게 사진의 모델과 같지는 않습니다.) 물의 양과 붓는 방식을 어느 정도 프로그래밍할 수 있었고, 온도의 대한 통제 기능은 충분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용량은 컸지만 일반 매장에서의 판매가 많지 않은 까닭에 4-6잔 정도의 레시피를 고정해서 사용했죠.



사진 출처 : https://goo.gl/Y4MzxZ

모카 마스터가 한국의 스페셜티 커피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2010년을 넘으면서인 것 같습니다.



윌파 브루어는 한국에 2014년 경 소개되었는데요. 세련된 디자인은 물론 상당히 안정적인 수온 유지 능력, 팀 윈들보와의 개발 협력 등의 이유로 시장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위에 소개한 머신들은 시장에서 차지하는 포지션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 비슷한 목적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대용량 배치 브루 머신을 모카 마스터나 윌파 브루어 1대가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지만, 2-3대를 사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하죠.


개인적으로는 1대의 대형 배치 브루 머신 보다는 모카 마스터나 윌파를 여러 대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지속적으로 커피를 분쇄하고 추출하면서, 커피 향과 추출 장면을 손님과 계속해서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치 브루의 추출 특성


배치 브루는 한 번에 여러 잔 분량의 커피를 추출하다보니 추출 시간이 긴 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과거에는 한 배치의 추출에 10분 여의 시간이 걸리기도 했는데요. 분쇄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모카 마스터나 윌파의 경우 1리터의 물을 사용해서 추출을 완료하는데 6~8분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일반적인 핸드드립/푸어오버에서 추출에 걸리는 시간이 짧게는 1분 30초, 길게는 3분 30초의 시간이 걸리는 것에 비해 이것은 분명히 아주 긴 시간입니다.


TDS% EXT%가 같은 두 잔의 커피라고 할지라도 3분에 추출한 커피와 6분에 추출한 커피는 관능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가집니다. 이것은 해당 TDS%를 차지하는 성분의 비율에 따른 것인데요. 배치 브루 같이 긴 시간의 추출에는 극성이 낮은 성분의 추출 비율이 높아지게 됩니다. 따라서 핸드드립/푸어오버에서와 같은 TDS% EXT%로 배치 브루 커피를 추출했을 때, 관능적으로는 더 쓰고 지저분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배치 브루의 레시피를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하리오를 사용해서 2분에 추출한 TDS 1.25% EXT 20.0% 커피가 본인의 입에 만족스러웠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배치 브루를 이용해서 4분 혹은 6분에 추출한 커피를 본인의 입에 그나마 만족스럽게 추출하기 위해서는 수치적으로 TDS%와 EXT%를 더 낮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입니다.


2분 : TDS 1.25%, EXT 20.0%

4분 : TDS 1. 15%, EXT 18.5%

6분 : TDS 1.05%, EXT 16.5%


여러 잔을 동시에 내려서 총 추출의 시간이 길어질 수록, TDS% EXT%는 내려가고 분쇄도는 상당히 더 커져야만 합니다. 제 경우에는 긴 시간 추출한 배치 브루의 경우 TDS를 0.9 % 수준까지 낮추기도 합니다.




배치 브루와 스페셜티 커피


추출 시간이 더 긴 배치 브루는 의도치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극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었던 커피의 향미를 편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분명 푸어오버로 한 잔씩 내려먹기에는 불편한 느낌이었던 커피의 자극적인 맛이 배치 브루에서 먹을만하게 표현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요. 오히려 한 잔씩 내린 푸어오버 커피보다 더 강한 향을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


스페셜티 커피 마니아에게 배치 브루 커피는 완벽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먹을만한 커피가 될 수 있고, 스페셜티 커피(대개의 스페셜티 커피는 산미가 있는 편이니-)에 상대적으로 덜 익숙한 소비자에게도 배치 브루는 허용 가능한 산미와 충분한 향 덕분에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거기에 가격마저 저렴하다면 더할나위가 없죠. 




정리하며


사진 출처 : https://goo.gl/2ZPfmN

이런 설명을 보고 카페에서 배치 브루를 시도했을 때 성공 확률이 높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기능적으로는 배치 브루를 구현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배치 브루의 선순환 판매를 가능하게 하려면 '고객에게 배치 브루 커피를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의 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연속적으로 많은 커피를 손님이 찾지 않는다면 배치 브루는 시도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애초에 배치 브루를 염두에 두고 '잘 설계된' 카페라고 한다면 시장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에서도 '커피 한 잔 주세요.'라는 단순한 주문이 통하는 매장이 조금씩 더 늘어났으면 하는 저의 개인적인 바람에, 배치 브루는 하나의 대안임이 분명합니다.


- 글 : 커피찾는남자(Coffee Explorer)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