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공간

전분 공장의 변신, 제주 한림 앤트러사이트

Coffee Explorer 2015. 9. 9. 23:03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의 그림 중에는 ‘놀람(L'Etonnement)’이라는 수식이 붙은 두 개의 작품이 있습니다. '단순한 놀람'과 '공포로 놀란 얼굴의 정면’이라는 두 개의 그림은 우리가 느끼는 ‘놀람’이라는 감정의 두 가지 모습을 데생의 단순한 선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놀람에는 조금 더 다양한 종류의 감정과 순간들이 있을 텐데요. 가끔은 방문한 공간에서 놀라움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매우 이색적인 무언가를 만났을 때도 우리는 놀라게 되는데요. 기대했던 자연스러움이 어긋났지만 이색적 환희가 있다면 이는 우리를 멋진 놀라움으로 이끌게 됩니다.



출처 : http://www.photo.rmn.fr/archive/08-529139-2C6NU0TSUUFF.html





제주 한림에 자리 잡은 앤트러사이트(Anthracite)는 이색적인 느낌을 농축해 모아놓은 듯합니다. 앤트러사이트는 서울 합정역 인근에 있는 1호점이 연탄 공장이었던 공간을 개조해 만들어지면서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공간인 제주점은 전분 공장을 개조하면서 1호점의 컨셉을 자연스레 이어가고 있는데요. 감성을 느낄 수 있다고 기대하기 어려운 공장에서 느끼게 하는 기묘한 감성은 우리에게 이색적인 놀람을 느끼게 하기 충분합니다.








공장이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 이곳이 카페라고 알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허름한 건물로 보이는 데가 간판도 없어서 미리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기에 십상입니다. 공장 안에는 여전히 과거에 사용했던 다양한 기계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습니다. 아무리 공장이라도 그렇지 바닥에 별다른 재질로 부드럽게 마감하지 않은 건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가공되지 않은 돌 바닥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니지 않으면 발이 걸려 넘어질 위험은 있지만, 건물 안에서도 제주의 땅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가장 강렬한 체험을 줄지 모르겠습니다. 이쯤 되면 조심스레 걷는 걸음은 큰 불편함이라기보다는 이색적인 불편 체험에 가깝습니다. 물론 정말로 넘어지는 일이 없다면야 말이죠.











이곳은 제주의 한림읍에 위치합니다. 한림(翰林)은 1956년에 읍으로 승격된 제주도 제3의 도시로 동쪽에 큰 수풀이란 뜻의 대림(大林)과 남쪽에는 달빛 속의 수풀이란 뜻의 월림(月林)이 있습니다.(땅 이름 점의 미학, 2008. 5. 15. 부연사) 여행자들에게는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하나인 '협제'와 그 앞에 ‘어린 왕자’ 속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형상의 비양도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수산기지로 발전하며 그때 세워진 제빙공장이 여전히 가동하고 있는 곳이지만 여행자들에게 한림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선물해준 곳으로만 기억될 가능성이 큽니다.


제주, 한림이라는 지리적 특성이 때문에 앤트러사이트에 모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객들입니다. 가득한 제주 여행 가운데 이곳에 들른 사람들이 어쩌면 이곳의 분위기를 완성시키는 가장 특별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제주 여행을 생각해보세요. 바빴던 일상을 내려놓고 제주를 여행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색의 이야기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표정에서 가득합니다.









물론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지난 2015년 4월 문을 연 이곳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가 가질 수 밖에 없는 단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공장을 일정 부분 개조했지만 여름 계절에는 인류 최대의 발명이자 동시에 이기라고 할 수 있는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은 것은 이곳의 컨셉을 강화시키는데 크게 일조했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숨이 턱 막히는 사우나’의 체험을 하게 만듭니다. 언젠가 에어컨을 설치할 거라는 이야기를 얼핏 본 기억은 나지만 에어컨이 아예 없는 편이 제주의 전분 공장 체험에는 더 탁월하겠죠. 게다가 열효율이 지극히 떨어지는 옛 건물 구조다 보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일하는 바리스타를 생각하면 그들을 위해서라도 에어컨이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계절에 따라, 요일에 따라, 시간대에 따라 갑자기 몰려왔다 사라지는 관광객들의 패턴 때문에 항상 넉넉히 바리스타를 배치하기 어려워 손님이 몰리는 때에는 아주 긴 시간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여름 피서철에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몰렸을까 싶은 생각에 여름이 다 지나고 9월에서야 글을 올리게 된 것에는 저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9월이 넘어 방문하면 저의 추천으로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들도 조금은 더 높은 만족을 얻어가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죠. 절대 귀찮아서가 아니었습니다.











혹시나 정보에 아주 빠르지는 않으셔서 커피찾는남자의 소개로 이제서야 앤트러사이트 제주 한림점에 방문한 사람도 있으시겠죠? 글의 서두에서 소개한 샤를 르 브룅의 '놀람’과 같은 표정으로 몹시 이색적인 공간을 충분히 누려보시길 바래요.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천천히 전분 공장의 이색적인 느낌이 사라져가고 제주의 땅에서 피어오르는 수분과 따스한 햇살에 마음이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여름의 열기가 한풀 꺽인 지금쯤, 한적한 오전 시간이라는 전제 한 두가지를 붙이고 나면 앤트러사이트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진 경험을 남길겁니다.